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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찾고 온기를 나누는 여행 – 캘리그라퍼 이동근 ( 1 )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1-02 14:52     조회 : 4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광고기획 대행업체 <세경애드>.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텅 빈 사무실에는 또 다른 작업의 장이 펼쳐진다. 테이블 위로 서화용 잿빛 모포가 깔리고 하얀 종이와 먹 그릇, 붓이 차례로 놓이더니 이내 은은한 묵향이 흐른다. 시간이 지나자 일필휘지로 쓴 작업물들이 바닥에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낮에는 몸 사리지 않고 일하는 열혈 사장님, 밤에는 글씨예술가-캘리그라퍼가 되는 ‘두 얼굴의 사나이’(?) 세경애드 이동근대표(55)를 만났다.
어렸을 때 꿈이 서예가셨어요?
-글쎄요. 사실 꿈이라는 게 없었어요. 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지요. 변산반도 ‘곰소’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초등학교 운동장 끝이 바다였고, 바로 집 뒤에 염전과 창고들이 있어서 맨날 게 잡고 조개 줍고 선창 나가고 염전 놀러 다녔어요. 바다 아니면 산에 갔죠. 몸을 움직이며 노는 게 공부였던 시절이었어요.
특이했다. 실현가능성을 떠나 어렸을 땐 대통령이라든지, 선생님이라든지 화가, 예술가를 한번 쯤 꿈꾸었음 직 한데 뭐가 되고 싶단 생각이 아예 없었다니. 하지만 바다로 산으로 다니며 몸을 움직이고 노는 게 일상이자 공부였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꿈’이란 게 꼭 직업을 가리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유의지로 사는 삶을 꿈꾸다
-돌아다닐 때 외에는 늘 책을 끼고 살았어요. 만화책부터 어린이전집까지 빌릴 수 있는 책 은 모두 빌려 다 읽었어요. 책을 읽고 있으면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죠.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를 공고 히 하면 언젠가는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등 학교 때 헤르만 헤세, 니체, 이청준, 최 인훈과 같은 작가들의 책을 접하면서 실존, 생의 철학 등에 골몰하게 되었어 요.
실존 철학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삶의 방식인 것이다.
너른 세상을 접하는 게 좋아서 틈만 나면 산이든 바다든 가고 그럴 수 없을 땐 책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았던 소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선택, 그러니까 부모라는 존재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 존재잖아요. 태어난 후에도 주변인들의 사랑이든 뭐든 양육이라 는 수동적인 과정을 거쳐 나라는 존재가 일부 만들어지게 되고요. 그러니 다른 이가 만드는 존재에서 벗어나려면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한다, 거기에서 자유가 시작되고 삶의 방식을 온전히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삶을 영위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고교에서 대학생활로 이어졌고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교내 폭력서클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건강한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체적 힘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역도부에 들어가 운동했고, 자신의 의지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사학과를 선택했다고. 심지어 대학생 때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유도 역사나 비판의식 때문이 아니라 교내에서 친구들이 경찰에게 잡혀가는 걸 보면서 누군가의 사상이나 자유가 억압 받고 침해당하는 것에 분노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동체를 꿈꾸다
-입대 전엔 아버지를 도와 연탄과 석유를 배달하면서 등록금 마련하는 걸 거들었어요. 제대하고 복학한 후엔 집을 나와 방학 땐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학기 중엔 독서실 총무를 하면서 등록금을 포함해서 자력으로 생활비를 마련했죠. 그러던 중 친구들 네 명과 의형제를 맺고 시골에 땅을 사서 경작하며 공동체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어요. 졸업하기 전에 자본을 모아야 했죠. 당시엔 서강대· 고대 출신 등 소위 엘리트들이 간판회사를 운영한 케이스가 없었어요. 그래서 삼성동 가건물에 간판회사를 세우고 기획실을 만들어 국내 굴지의 회사들을 상대로 영업했어요. 우리 손을 거치지 않은 간판이 없을 정도였어요. 사업은 번창해서 직원이 25명까지 늘었어요. 그때 결혼도 했지요. 스물여덟 살 때였어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청년이 졸업 전에 결혼이라. 결혼은 엄밀히 말하면 사회적 계약이자 구속이 아니던가.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앞세우며 살겠다는. 그조차 본인의 의지로 택한 구속이지만 자의식 강한 청년의 마음을 움직인 건 무엇이었을까.
-매년 1월1일 해돋이를 보러 북한산에 올라가는데 거기서 아내를 만났어요. 학교는 달랐지만 전공이 사학과이고 산을 좋아한다는 점을 포함해서 여러모로 생각이 비슷하고 잘 통했어요. 자취하면서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할 때라 밥을 제 때 챙겨먹지 못했는데 아내가 학교 근처 만두가게에서 음식을 사갖고는 식을까봐 뛰어왔어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이 사람이다 싶었죠.
서강대 정문 잔디밭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박홍 총장님이 주례를 서시고 후배들이 신시사이저를 가져와 연주하고 신랑신부 동시 입장 등 이색결혼식이라 경향신문에도 기사가 났어요. 결혼 준비과정에서도 예물, 예단, 모든 것을 제가 정하고 간소하게 했어요. 외형적인 것 때문에 본질을 흐리는 건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고 믿었어요. 그땐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확신했고 나중에 생각해도 그랬어요. 다만, 지금 돌아보니 아내에겐 좀 미안하더라고요.
잘 나가던 회사는 부도가 나서 망했다. 다른 회사에 취직하여 3~4년 정도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빚을 갚아나갔다. 빚을 청산한 후 퇴사하고 친구와 동업하여 분당에 유기농회사를 차렸다. 공동체를 만들어 농사를 짓겠다는 꿈이 그때까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기상조였다. 소규모 다품종 생산물을 소비자에게 소개해야 하는데 국내의 땅 상태가 너무 엉망이었다. 소비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계약재배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걸 지원해야 하는 판매 측 역량도 없었다. 이걸 유기농 작물이라 할 수 있을지 저농약 작물이라고 해야 할지 용어 선택부터 유기농에 대한 의구심, 나아가서는 한국농업실정에 대한 회의가 들어 과감히 사업을 접었다. 광고기획회사를 세워 영업을 하던 중 IMF사태가 터졌고 전에 근무했던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매장 하나를 내놨는데 그걸 인수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세경애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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